나는 집을 나섰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혀 계획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는 헌혈하는 곳에 들러 약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는 헌혈을 한 다음
근처에 있는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음이 내키면 역시 근처에 있는 회사에 잠깐 들러
회사 컴퓨터에 있는 개인적인 파일 몇 가지를 집으로 전송하고
역시 개인적인 물품 몇 가지를 챙겨 오려고 했었다.
이것들 모두 굳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잡다한 일들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차피 집에 있는다고 해서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의 허술한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말았다.
헌혈을 하기 위해 들른 헌혈의 집은 시간이 늦어 내가 원하는 종류의 헌혈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헌혈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 내가 선호하는 종류는 '혈소판 헌혈'이라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내 혈액 속에 있는 혈소판 성분만 채취한 후 나머지는 다시 몸 안으로 돌려보내주는 헌혈법인데,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지만 몸에 큰 무리가 오지 않고
무엇보다도 2주만 기다리면 다시 헌혈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난 혈소판 수치가 좋은 데다가 AB형이라서 헌혈하는 간호사들이 혈소판 헌혈을 추천하기도 했고.

처음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빈틈없이 맞추어 놓았던 시간계획이 전부 비틀어지고야 말았다.
성당 주일미사 시간까지는 아직도 50분(혹은 1시간 50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 동안 동행 없이 혼자 움직이는 나로써는 시간을 때울 일이 마땅치 않았다.
50분은 참 애매한 시간이다.
하릴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고,
그렇다고 근처 PC방을 들어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결국 나는 계획을 수정해서 근처에 있는 회사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뭐 컴퓨터를 켜서 파일을 전송하고 물건을 챙기는 일이 그다지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자, 내가 지난 일 주일동안 지겹도록 보아 왔던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지겹게 일해 놓고도 쉬는 날 회사를 오고 싶냐고 묻기도 하지만,
난 회사에서 하는 일이 힘든 것일 뿐 회사가 꼴보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하지는 않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회사라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철문을 지나치려는 순간, 차 한대가 나보다 약간 먼저 철문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들어서는 차 운전석 창문으로 슬쩍 보이는 모습은 우리 회사 사람이었다.
다른 부서의 책임자급 직원.
내가 달리 죄를 짓거나 그를 피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쉬는 날 회사에 온 사실을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해 회사로 들어가는 다른 입구로 향했다.
다시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가 회사로 들어가는 다른 입구에 도착했지만, 이런 제길.
다른 입구는 휴일이라서 그런지 굳게 닫혀 있었다.
결국 그 차가 들어갔던 입구를 통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고 있던 차에,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가 기억났다.
같은 팀 상사 두 명이 휴일인 오늘 출근을 했을 거라는 사실.
그건 중요한 것이었다.
상사 두 명이서 휴일에 출근해 일하고 있는데
말단 직원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 건 그다지 썩 좋은 광경은 아니다.
물론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는 법이다.
어쨌거나 휴일에 회사에서 같은 회사 직원을 마주치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니.
조심스럽게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가 그 두 사람의 차가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둘 다 차를 가지고 다니지는 않지만, 휴일에는 자주 차를 타고 출근했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라도 출근해 있다면 주차장에 익숙한 차가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았다.
없다. 차는 없었다. 그러면 벌써 퇴근했거나 아니면 식사를 위해 차를 타고 이동했거나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평소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차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섣불리 자리에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발신번호 표시 기능이 없는 회사 전화로 걸면 내가 전화를 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출근하기로 되어 있는 상사 대신 다른 직원의 회사 내선으로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서 전화를 받으면 바로 끊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직접 그 상사의 번호로 전화를 해서 신경을 쓰이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전화를 대신 받으면 전화가 끊기더라도 별 신경쓰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겠지.
따르르릉. 신호가 두어 차례 간 다음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이크. 냅다 전화를 끊었다.
젠장.
결국 회사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같은 팀에.
그래서 나는 결국 두 번째 계획도 성공시키지 못한 채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야만 했다.
그나마 괜찮은 건, 회사에 사람이 있는지 밖에서 알아보려고 그 난리를 피운 통에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
성당 주일미사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성당 앞에서 지루하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는 세 가지 계획 중 두 가지를 실패한 채 성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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