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2012)

9
감독
조근현
출연
진구, 한혜진, 임슬옹, 배수빈, 이경영
정보
드라마 | 한국 | 135 분 | 2012-11-29
글쓴이 평점  




0. 제작두레(소셜펀딩)

 많이들 알려졌다시피 26년은 모종의 이유로 제작투자를 받지 못해 일찌감치 영화화가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동안이나 크랭크인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작품 중 하나다. 투자를 받지 못한 제작사는 작년인가.. 올해 초부터 투자자가 아닌 일반 시민에게서 투자를 받는 '소셜펀딩' 형태로 제작비를 모으기 시작했고, 약 3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의 모금을 기반으로 하여 결국 여름에 크랭크인, 11월 말 개봉에까지 이르렀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제작자 입장에서도 꼭 만들어서 극장에 걸겠다는 집념이 있었고, 시민들도 3만 명이나 참여하면서 여러 가지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끌어모았다.


0.5 시사

 나도 소셜펀딩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써 영화 개봉 전 'VIP'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다. VIP시사회는 진짜 VIP를 모셔놓고 한 시사회를 말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소셜펀딩 참여자 시사회를 VIP시사회라고 지칭하더라. 암튼 월요일 저녁 7시쯤 왕십리 CGV에서 시사회에 참석했는데, 가봤더니 그 시간대 거의 모든 상영관이 시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워낙 많길래 무대인사는 안오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웬걸. 감독님과 출연진(한혜진!!)이 상영 전 들어와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갔다. 좀 늦게 가서 상영관 앞자리와 가장자리쪽 좌석에만 여유가 있었는데, 한혜진이 들어올 줄 알았으면 그냥 앞자리에 앉을 걸 그랬다는 포풍후회를-_-


1. 강풀의<26년>

 뭐 다들 알고 있겠지만 26년은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사실 원작, 특히 웹툰 원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나 선택하는 입장에서나 의외로 껄끄러운 면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선 '원작에 대한 충실도' 를 얼마나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거고, 영화를 선택하는 입장에서는 '웹툰 원작의 영화가 대부분 별로였다' 는 전례가 워낙 많아 주저하게 되는 면이 있다. 나 역시도 내 피같은 돈을 묻은 댓가로 시사회 티켓을 얻어 영화를 보러 가는 상황에서도 그런 부분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 안타깝게도 그 걱정은 어느 정도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 웹툰<26년>과 영화<26년>

 원작을 가진 영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숙제 중 하나는 역시 긴 호흡을 가진(혹은 가졌을) 원작을 두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얼마나 효과적으로 스크린에 풀어내느냐일 것이다. 26년 역시 같은 숙제를 안고 있었는데, 특히나 26년의 경우에는 '각 캐릭터들의 사연' 과 '본게임' 두 가지를 모두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었다. 관객들은 '본게임' 때문에 영화를 보러 온 건데, 정작 그 본게임이 개연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가진 사연이 확실하게 구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에게 주어진 두시간 남짓은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고, 결국 영화는 초반 '캐릭터 구축' 에서 상당히 서두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원작에서 긴 시간을 걸쳐 이야기했던 각 인물들의 사연들은 영화속에서 '너무 충실하게' 재연됨으로써(심지어는 더 많았다), 덕분에 각 씬들이 짧게짧게 편집되면서 관객들이 충분히 몰입되기 전에 다음 씬으로 넘어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뭔가 이 씬에서 더 있을 것 같은데 점프해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버리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원작 내용을 좀 쳐내고 씬들 더 길게 가져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3. 원작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느낌은 내가 이미 원작을 수차례 보았고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초반 캐릭터 구축에 상당한 시간을 쏟았는데 사실 이것들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거든. 그러니 나한테 그런 장면들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수도 있다. 난 오로지 본게임을 실사 영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초반 캐릭터 구축씬이 원작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와닿았는지가 궁금하다. 과연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4. 순간(moment)

 이런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보여주는 각 순간의 퀄리티는 훌륭하다. 이건 물론 내가 광주사람이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지만, 각 장면들에서 보여지는 내용들은 확실하게 나를 웃기게도(오히려 작정하고 웃기는 장면보다는 순간적인 위트들이 나를 웃겼다) 하고, 초조하게도 하고, 분노하게도 했다. 본게임에 들어서면서는 각 장면들의 호흡이 오히려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 있게 전개되었다. 앞에 불평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요 부분에 대해 좋은 말을 더 해주고 싶은데, 긴장감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나-_-  아무튼 본게임에 들어서자 가슴을 울리는 명대사가 많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개인차가 있지 않을까... 싶다. 뭐 근데 이걸 보려고 극장 들어온 사람들 정도면 그 정도 감정은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5. 진구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주인공 격인 '곽진배' 를 연기한 '진구' 다. 진한 광주 사투리를 구사하는 깡패새퀴로 나오는데, 이 사투리가 정말 서울출신 연기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사투리란게 대부분 억양이나 단어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 듣고 있는 네이티브 스피커(?)의 입장에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우가 많은데, 진구가 구사하는 광주 사투리(다 같은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다. 지역별로 미세하게 차이가 있음)는 20년을 살았던 내 입장에서도 거의 완벽했다. 덕분에 곽진배란 캐릭터에 확실히 감정이입이 될 수 있었고 다소 억지스러운 장면에서도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내 입장에선 거의 '진구의 재발견' 정도로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나머지 연기자들도 뭐 딱히 나쁘지는 않았는데, 다만 임슬옹이 비중이 크지 않아 여성팬들 입장에선 좀 아쉽지 않을까하는 생각. 한혜진 역시 나쁘지 않았지만, 히로인 치고는 캐릭터 자체가 무뚝뚝한데다 진구가 워낙 빛나서 좀 묻혔다고나 할까. 


6. DVD

 막 쓰다 보니 나도 이야기가 막 튀는데, 전체적인 감상평은 'DVD가 기다려지는 작품' 정도라고 해 둬야겠다. 잘 만든 영화고 빛나는 장면들이 많은데, 편집을 다소 급하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관 개봉의 제약사항같은걸 감안하면, DVD에선 디렉터즈 컷 형태로 좀 더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말을 하는 건, 내년 3월에 DVD를 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함-_-


7. 26년, 그리고 32년 후

 이래저래 영화에 대해서만 떠들었는데, 사실은 이것저것 다 필요없고 이 영화의 가장 큰 포인트는 다름아닌 29만원을 가진 '그 사람' 일 거다. 원래 26년 웹툰 자체가 32년 전 그 사건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목적에서부터 출발했었고, 웹툰이나 영화 모두 그런 목적 면에서는 훌륭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영화가 아직까지는 그사람에 대한 분노를 '자위' 하는 정도라는 게 안타까운 점이다. '그 사람' 역의 장광씨가 아닌, 29만원을 가진 '진짜 그 사람' 이 심판받는 모습을 보고 싶은게 이 영화를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의 바람 아닐까.



<사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진구가 아니라 29만원의 그양반이지 않을까>



잡설

 1) 한국영화 특유의 오바스런 장면들이 좀 나와 불편했다. 특히 멀끔하게 생긴 배수빈이 난데없이 강도 높은 육두문자를 날리는 장면에선 적잖게 당황-_-

 2) 상무 나이트클럽... 보고 혼자 빵 터질뻔 했음;;

 3) 실물로 본 한혜진은 멀리서 봤는데도 이쁘더라. 화장을 진하게 하긴 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연예인의 아우라'가 풍겼다고나 할까.

 4) 시사회장에서 실제로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정서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장 우리 엄마만 해도 공수부대(진압군이었던 특전사를 '공수부대' 라고 부른다) 이야기만 나오면 질겁을 하신다. 이런 광주사람들 정서가 영화를 통해 전달이 잘 되었으려나.

posted by dru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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