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1985 (2012)

Namyeong-dong1985 
9.2
감독
정지영
출연
박원상, 이경영, 명계남, 김의성, 서동수
정보
드라마 | 한국 | 106 분 | 2012-11-22
글쓴이 평점  



 남영동이란 지명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서울시 용산구의 한 동네일 수도 있고, 서울역 다음 역인 '남영역' 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했던 70~80년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을 게다. 바로 '고문' 하면 생각나는, '남영동 대공분실' 때문에.

 또 남영동 대공분실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으니 작년 12월 세상을 떠난 고 김근태 고문이다. 김고문은 바로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 1985년 9월에 잡혀와 약 20여일간 가혹한 고문 끝에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의 배후조종세력으로 지목되어 2년여간을 옥살이했던,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사람이다. 그는 그 고문의 끔찍했던 기억을 글로 옮겨 책으로 펴냈다. <남영동 1985>는 바로 이 김근태 고문의 수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 속에는 가족들과 목욕탕에 갔다가 잡혀온 '김종태' 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물론 김종태가 김근태 고문이다. 김종태는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조사를 받고, 조사 중 '장의사' 라고 불리는 '이두한' 이 등장한다. 이두한도 군사독재시절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실제 인물과 매치가 된다. 바로 그가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았던 이근안 경감이다.

 영화는 김종태가 잡혀온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의 떠나지 않고 흘러간다. 목욕을 하다 잡혀오는 그 장면과 김종태가 정신적 한계상황에 처해 환영을 보는 그 짧은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공분실 5층을 떠나지 않는다. 영화 스토리랄 것도 없다. 잡혀온다. 조사받는다. 맞는다. 회유한다. 또 맞는다. 고문당한다. 이두한이 등장한다. 고문 러시를 당한다. 결국 모든 것을 자백(?)한다. 이게 이 영화의 전부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그걸 지켜보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다.

 영화는 잔혹한 고문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고(비주얼적으로 잔혹해 보이지는 않는다. 피 한 방울 안 나오기 때문에), 그에 따라 대쪽 같던 한 인간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보여준다. 간혹 수사 책임자로 등장하는 명계남(전무)이 만화적으로 악랄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 외의 수사관들은 각자의 인생을 가지고, 그 생활을 위해 직장에서 투덜거리며 일하는 직장인 그 이상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고문 기술자' 이두한의 모습 역시 무미건조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는 다른 수사관들과는 다르게 '프로' 나 '장인(匠人)' 의 자세로 일(?)에 임한다. 죽지 않고, 흔적이 남지 않는 선에서의 최고 수준 고문을 위해 김종태의 건강을 꼼꼼히 체크하고, 스톱워치로 물고문 시간을 조절한다. 전기고문을 하면서 장치의 다이얼을 돌리는 장면은 장인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손놀림을 보여주며, 전무를 비롯한 뜨내기 수사관들이 안절부절하는 상황에서도 항상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그는 영화 중에서 딱 한번 흥분한다). 영화는 '고문' 이라는 상황적 괴로움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평온하고 고즈넉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고문 장면이 너무도 괴롭게 다가온다. 이두한이 평온한 모습으로 김종태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데, 감독은 이걸 잔인할 정도로 길게 보여준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고문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고문 장면은 '이 정도면 됐다'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애가 타서 소리를 지를 때까지, 평온하지만 집요하게 고문 장면을 여과 없이 끝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롭다. 잔인하거나 무서운 장면이 나오지 않으니 눈을 돌릴 이유는 없지만(사실 난 피가 튀어도 눈을 돌리지는 않는다),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이 영화 앞에서는 영화 속의 김종태보다 내가 더 빠르게 비겁해진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이제 그만 끝났으면 싶지만 영화 속의 김종태는(그리고 현실에서의 김근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정의를 사랑하고,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내 비겁함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과연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나는 과연 진실과 정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정의롭게 살아낸 고 김근태 고문(하필 생전의 마지막 직함이 고문...)을 재조명함과 동시에, 내 비겁함 또한 재조명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posted by dru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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