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올라와 내 방을 가지고 자취생활을 한지 어언 4년,
방 두 군데에서 겨울은 네 번 났다.
그런데 두군데 모두 항상 보일러가 말썽이다.
(물론 지난번 중곡동 지하방은 보일러보다 더 큰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저번 중곡동 지하방에 살때는 보일러가 위험천만하게도
부엌 옆에 아무런 가림막 없이 붙어 있고, 게다가 가스렌지대 바로 위에 위치해 있어서
사는동안 총 4번 안전점검에서 모두 뜯어서 옮기라는 '위험'판정을 받았었다.
강제배기식인가, 뭐 그런 형태의 보일러는 실내에 있으면 자칫 가스가 실내로 들어와 위험하다나 뭐라나.
물론 내가 고칠 게 아니고 집주인이 고쳐줘야 하는 거였는데, 집주인은 가스점검원을 욕하며 보일러를 고쳐주지 않았었다.
(세입자 세대 보일러에 지적사항이 생기면 집주인한테도 통보가 가는 듯)
그래서 나는 아예 몰랐더라면 좋았을 사실을 알아버린 턱에 2년 내내 굉장히 가스냄새에 민감한 채로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안죽고 그 집을 벗어나긴 했지만.

지하탈출의 부푼 꿈을 안고 지금 사는 북아현동 집에 들어온 그날.
역시나 산꼭대기 집이라 3월인데도 굉장히 추웠다.
그래서 보일러를 틀었는데 웬걸. 좀 돌다가 멈추고, 돌다가 멈추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어쩌다 오래 가길래 그걸로 겨우 방을 데우고 잠을 잘 수는 있었지만, 아침에 보니 여지없이 보일러는 꺼져 있었다.
그때 번쩍 생각이 난 집주인의 이야기.
'먼젓번 살던 놈들이 촌놈이라 보일러가 멀쩡한데 켤줄도 모르고 난리였다'
이 망할놈의 집주인은 보일러가 고장났는데도 세입자를 바보 취급하면서 보일러를 고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일단 말 안하고 보일러 수리를 불렀다.
고치러 갔더니 역시나 점화플러그쪽의 고장. 근데 문제가 또 있었다.
보일러실이 절벽에 위치해 있는 것이었다-_-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실외 보일러실이 절벽 끝에 있어서 아저씨가 기겁을 하면서 겨우 고치셨단다.
그나마도 배수관 쪽이 있는 보일러 아래쪽은 열리지가 않는 통에 저거 뜯어내기 전엔 배수관쪽 문제 생기면
고칠 방도가 없다는 말도...
고장나면 큰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주인한테 연락을 해서 보일러가 고장나 있었고 수리비가 얼마 나왔다고 했더니 군소리없이 월세에서 빼고 입금하란다. 보일러실 이야기도 하려고 했으나 재개발지역에 있는 집 보일러를 뜯어서 고쳐줄리 만무하겠기에, 그리고 보일러가 설마 고장이 나겠어 하는 생각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전에 살던 집은 위험해서 그렇지 보일러는 한번도 고장난적이 없었던 터라.

그런데 그렇게 입주하고 나서 잘 살다가 겨울이 왔다.
원래 보일러 빵빵 트는 체질이 아닌데다가 가스비가 무서워 보일러를 완전 오프해놓고 필요할때만 잠깐 켜서 썼었는데, 그러다가 보일러가 덜컥 얼어 버렸다.
그것도 눈 펑펑 오는날 야근하고 들어왔는데.
그 기겁을 한 보일러실을 고쳐달라고 부르기도 민망했고, 이미 보일러수리를 부르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만반의 대비를 하고 보일러실이 위치한 집 뒤 절벽으로 향했다.
내가 자신있게 보일러실로 향할 수 있었던건 이미 아는 증상이었기 때문인데, '물부족' 경고등이 뜨는 상황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보일러의 '물부족'은 아래 배수관을 열어서 물이 차게 해 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고장이다. 해서 난 헤드마운트 램프(등산갈때 쓰는 머리에 붙이는 후레쉬)를 착용하고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보일러실 배수관이 그 알루미늄 벽에 막혀 손이 닿지 않았다.
수리기사 아저씨가 말해줬던 그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배수관 쪽 고장.
배수관에 손이 닿지 않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얘지기 시작했다. 지식인을 미친듯이 뒤지고, 배수관을 드라이어로 녹이라는 말도 안되는 어드바이스를 직접 실행했다. 그것도 떨어지면 2.5층 높이인 절벽 위에 몸을 내놓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찌 되었건 결국 나는 내 손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내고 말았다. 배수관 위에 있는 물통에 직접 물을 채우는 방법으로 보일러를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내가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시설의 집에 들어와서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보일러를 고치고 있어야 하는지.

그 뒤로도 결국 몇 번 같은 사태가 발생했고, 그때마다 직접 보일러실에 물을 채우러 위험천만한 짓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겨우 겨울을 지낼 수 있었고, 올해에는 보일러를 주기적으로 돌리면서 아직까지는 다행히 물부족 증상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제부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작년에 지겹게 겪었던 물부족 증상은 아니고, 실내 난방은 잘 된다. 뭔가 새로운 증상이 발생했지만, 다시 그 망할 보일러실에 가고싶지는 않다. 그냥 날 풀리면 다시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방치해놓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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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ru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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