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일주일 전인가, 밤늦게 티비를 보고 있다가 '술취한 여성 성폭행'에 관한
실험을 하는 프로그램을 봤다. 오션스 뭐시긴가 하는.
내용인즉슨,
밤늦게 번화가에서 여자들이 술에 취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때
과연 그 여자들을 누가 데려가서 어떻게 하는가 알아보기 위해
여자 출연자가 술에 취한 척 연기를 하고 있고 그걸 주위에서 지켜보며 실험을 진행하는
그런 것이었다.
세번을 실험했는데, 놀랍게도 세 번 모두 낯선 남자가 접근해서 데려가려고 하다가 적발되었다.
택시에 같이 타고 가려고 하는 인간도 있었고,
모텔이나 비됴방에 데려가려는 인간도 있었다.
물론 제작진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끌려가기(?)전에 실험녀를 구해내기는 했다.

평소에 길거리를 지나가다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는 여자애들을 보고
'저것들 저러다가 어디 끌려가서 따먹힐려고 저러냐'며 혀를 차고 지나가거나
술자리에서 술이 떡이 된 '모르는'여자애들을 보며 농담조로 그런 상상을 해보기는 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높은 확률로' 발생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2.
3일전쯤, 정장을 사러 문정동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8호선 문정역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중 갑자기 계단 밑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미친놈'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파카에 츄리닝 바지를 입은 남자가 쏜살같이 계단으로 뛰어올라오더니 우리 뒤로 사라졌다.
난 사태파악을 못하고 '뭐야?'하고 있는데 같이 가던 친구가
금방 뛰어올라간 남자가 여자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변태짓을 한것 같다고 했다.
내려가보니,(계단이 꺾이는 쪽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20대 중후반 쯤의 여자 한명이
역 진입로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티비나 영화 같은 데서 '바바리맨'같은 변태가 있다는 소리는 심심치 않게 들었지만
공공장소에서 여자에게 변태짓을 하는 현장은 처음 목격한 것이었다.
'정말 저런 놈들이 있구나'하며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그 이야기를 했다.


#3.
앞의 변태사건을 겪고 난 그날 저녁 11시쯤,
건대역 쪽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인적이 드문 길 저편에서 20대 여자 하나가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건 아닌 것 같고, 잠깐 지켜보니 힐 뒷굽이 나갔거나 뭐 그런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무슨 신발이 문제가 있어 신발 밖으로 발가락이 나와 있고, 신발이 발목에 걸려서 끌고 오는
그런 상황으로 아주 힘들게 걸어오고 있었다.
문득 힘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도와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야심한 시각에 어두컴컴한 거리에서 낯선 남자가 접근하면
십중팔구 변태나 성폭행범 또는 강도 취급을 당할 것 같아 그냥 모른척 했다.
(흉악하게 생긴 얼굴은 '절대'아니다-_-)
사실 내가 간다고 해도 딱히 도와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여자는 내 앞을 지나쳐 역 입구로 들어가는 내내 고생스러운 몸짓으로 걸어갔고,
덕분에 난 괜히 쓸데없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안전과 재산에 대한 위협'이외에도
그들에게는 '수치심에 대한 위협'이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디어를 통해 성폭행이나 성추행 등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오며 살아왔지만
흔치 않은 일, 나와는 전혀 다른 먼나라의 이야기로만 생각해왔다.
주변에서 뭘 당했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고...(그런 이야기가 소문이 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내가 술자리에서 농담조로 하던 성폭행 상황이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공공장소 성추행 현장을 목격하고 나니
'이게 전혀 딴세상 이야기만은 아니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섣불리 낯선 여자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한 거고.
생각보다 성범죄란 건 우리 가까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필자는 남자다;;),
정말 가까운 주위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 뿐.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수치심에 대한 위협이 꽤나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기에.
(다른 방면으로도 힘들겠지만, 일단 이야기하고자 하는건 이거니까)



그 절뚝거리는 여자분을 보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집에 돌아오면서
꽤나 많은 생각을 했는데, 막상 글로 옮기니 별것 아닌 이야기가 되어버렸다-_-



posted by dru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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